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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과 물건

버리기도 중독이다(버리기병에 걸렸을 때)

by 천천히 스미는 2025.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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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을 접하고 한참을 물건을 갖다 버릴 때 이야기다.

 

안 쓰던 물건을 버리고, 기능이 중복되는 것도 버리고, 

쓰레기도 버리고, 먼지도 버리고, 평소 마음에 안 들던 것도 버리고,

이런저런 것을 다 갖다 버리다 보니 더 이상 버릴 게 없게 되었다.

 

버리기도 중독이 된다.

계속 버리고 싶어졌다.

 

더 이상 버릴 게 없어지니 기존에 잘 쓰던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하나가 전자레인지였다.

 

 

목차

1.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를 버리고 에어프라이 겸용 전자레인지를 살까?
2. 버리기도 중독이다.
3. 버리기 중독치료법 : 내가 남긴 선택에 집중하기

 

 

 

전자레인지와 에어프라이어를 버리고 에어프라이 겸용 전자레인지를 살까?

전자레인지는 내가 결혼 전에 8만 원에 사서 여태까지 잘 쓰고 있었다.

에어프라이어도 신혼 때 사서 잘 쓰고 있었다.

 

그런데 버리기 병에 걸리니 이 두 물건을 합치고 싶은 강한 열망이 들었다.

전자레인지랑 에어프라이어를 버리고

에어프라이 기능이 있는 전자레인지를 사면 어떨까?

그럼 두 개 차지할 자리를 하나만 차리하니 공간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자레인지는 신혼 때 바꾸지 않았으니 한 번쯤 바꿔도 되고,

에어프라이어는 윗 뚜껑이 투명이었는데 오염이 심하게 보이고 청소도 어려운 제품이니 

이래저래 두 개를 버리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쿠팡에 찾아보니 에어프라이 겸용 전자레인지는 20만 원 중반대.

이 합리적인 선택 당장 실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뷰를 읽어보니 이런 제품은 에어프라이 기능을 사용하고 나서 열이 내릴 때까지 전자레인지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생각해 보면 지극히 개연성 있는,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을 알게 되었지만

공간을 합리적으로 쓰기 위한다는 버리기 병에 걸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이 원대한 계획을 막상 실행하려 하니 왜인지 찝찝함이 들었다.

쿠팡에 구매 버튼만 누르면 내 계획이 실행되는데 왜인지 브레이크가 걸렸다.

 

그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갔다.

 

 

 

 

 

버리기도 중독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에어프라이어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에어프라이어를 산 초반에는 통삽겹살 구이도 해 먹고, 군고구마도 구워 먹었다.

냉동 피자도 갓 한 피자처럼 구워 먹고, 베이글도 노릇하게 구워서 참 맛있게 잘해 먹었다.

 

그런데 내가 산 에어프라이어는 세척이 어려운 모델이었다.

투명 윗 뚜껑은 고기 기름이 튀었다가 말라붙어 있었고, 

굽다가 생긴 검은 재 같은 것도 나사 사이사이에 껴있었다.

위생적으로 나쁘다는 생각이 들어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에어프라이 겸용 전자레인지를 사면 세척이 편리할까?

그다지 편리하진 않을 것 같다.

 

안 쪽만 닦는다고 해도 그 환풍기 같은 구멍 사이사이에 기름이 껴있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에어프라이어보다 더 분해가 안 되는 게 에어프라이 겸용 전자레인지니까 

더욱 청소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한텐 지금 에어프라이어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에어프라이 겸용 전자레인지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자레인지는 지금도 작동을 잘하고 있고, 잘 사용하고 있는데

멀쩡하고 현재 필요한 제품을 갖다 버리는 게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렇게 나는 에어프라이어와 전자레인지를 버리고

에어프라이 겸용 전자레인지를 사려는 계획을 버렸다.

그리고 추가로 쓸 때마다 찝찝하고 잘 사용하지 않는 에어프라이어도 함께 버렸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버리기도 중독이 되는구나.

버리다 버리다 못해 이젠 잘 쓰고 있는 것까지 버리고 다시 사는 한이 있더라도 버리려 하는구나.

 

왜 중독이 될까 생각해 보면

알콜중독이나 마약중독, 도박중독이 별 다른 노력 없이 쾌락과 행복 같은 도파민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버리기도 별 다른 노력 없이 쾌락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버리는 게 한 번 두 번 버리다 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버리다 보면 재미도 느낀다.

그렇게 버리기에 중독되는 것 아닐까 싶었다.

 

 

 

 

 

버리기 중독치료법 : 내가 남긴 선택에 집중하기

지금 잘 사용하는 물건도 갖다 버리려 할 만큼

어느새 나는 '버리기' 자체에 중독되어 있었다.

처음엔 필요 없는 것들을 정리하면서 삶이 더 가벼워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버리는 행위' 자체에만 쾌락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이쯤에서 적당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남긴 것을 잘 사용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필요한 물건을 모두 정리하고 나면, 결국 남은 것은 내가 선택한 것들뿐이다.

나는 그 물건들을 '지금 쓰고 있기 때문에', '현재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남겨두었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은 버리는 데 집중할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누리는 것이다.

 

이렇게 가벼워진 상태에서야 비로소 미니멀리즘의 본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드는 과정이라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물건을 비우는 과정에서 오히려 나는 물건에 집착하고 있었다.

더 적게 가져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면서, 정작 중요한 것(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은 뒷전이었다.

미니멀리즘을 실천할수록 물건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지는 이 모순적인 상태를 깨닫고 나니,

방향을 바로 잡아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나는 '얼마나 더 버릴까'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것들을 어떻게 잘 활용할까?'를 고민하려 한다.

버리기가 목표가 아니라 선택한 것들로부터 내 삶을 채우는 것.

그게 진짜 미니멀리즘 아닐까.

 

 

 

 

 

 

 

천천히 스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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